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우리가 존재한다면 우리도 사라진다. 사라져가는 시간을 위한 존재의 남겨짐, 그것이 바로 기록이다.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의 몸부림이 당연한 것이라면 우리의 존재를 위한 기록의 본능도 여전하다.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나무에 새기고, 돌을 다듬고 말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고 이제는 시간을 남기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소통을 위해 SNS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진실만은 아니다. 타인의 기억까지 상상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며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 힘을 쏟는다. 어쩌면 지나간 모든 것들이 존재를 만들고 그 존재는 지금의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는 그대로 버려진 것이 없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들의 존재를 글로 담는다. 사람은 사람끼리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자기만의 세계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다른 공통점을 만든다. 흥미롭다. 나는 산을 오르지 않고 산을 보고 있다. 그들의 삶에서 한 번도 나와 함께 간 적이 없는 길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다.
이별은 가장 거룩한 죽음이다. 내 인생을 내가 설계한 사람은 없다. 나는 사랑이라는 설계도를 따라 만들어지고 자라고 죽는 사랑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침묵을 강요당한다. 우아한 나이 듦을 위하여!
종이 첫 줄의 시작
종이는 하늘과 땅을 잇는 꿈의 길이다. 남겨보고 싶은 처절한 본능이며 영원하지 못한 육신의 몸부림이다. 책은 나무의 숲이다. 길게 늘어선 핏줄과 아담하게 정리된 창자가 그리움을 더한다.
우리는 하루를 보내면서 하늘을 본다. 해가 솟아나는 바다를 보기도 하고 높은 산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붉은 불덩이를 향해 소리를 치기도 한다. 죽음은 삶을 모두 채운 완성이다. 꼬리를 감춘 믿음의 잔해는 노년이 되어버렸다. 어떤 반전의 예언이 눈을 감은 현실을 위로한다.
종이 첫 줄의 시작은 기도다. 겨울처럼 흑과 백이 공간을 채운 영혼의 민낯이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웃에 대한 책임도 우리의 몫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다. 우리는 모든 타자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하는 존재다. 우리가 외면하고 감추고 하늘에 실종 신고를 해서는 안 된다. 자막 없는 외국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신앙은 너무 가볍다. 방향을 모르는 달리기는 무섭다. 그리고 너무 위험하다. 살아온 인생, 그리고 살아갈 인생, 그 모든 것은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위안을 만들어 본다.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 바퀴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침묵한다.
인생 후반기는 죽음의 가치다. 인생 후반기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에게 많은 경험과 경륜이 있다. 인생 후반기에는 욕심을 내볼 만한 의욕이 생긴다. 용기를 내어볼 만도 하다. 사랑 앞에서 내보지 못했던 용기, 배움의 길에서 주저앉았던 좌절, 이제 과거와 화해하고 살아갈 날에 손을 내밀어보자. 우리가 그렇게 흥분했던 청춘의 혈기는 성공과 교만이었다.
창조의 완성은 흔적이다
존재는 소리 없는 빛으로 새겨진다. 말씀이 아니라면 펜을 놓아야 한다. 순종이 아니라면 마차의 그림자는 먼지를 감추고 책을 덮어야 한다. 영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엄한 창조는 이제 완성이다. 스스로 계신 자의 이름이다. 그 이름 아래, 모든 창조는 심장이 되고, 눈물이 되고, 기다림이 된다.
총알 하나가 인생을 끝낼 수 없다. 창조는 그렇게 허무한 것이 아니다. 아이의 죽음도 스쳐 지나간 우연도, 이해할 수 없는 순간도, 인생의 작은 한쪽이었다. 창조는 그 작은 파편까지 끌어안아 빛으로, 생명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한다. 소금이 맛을 잃고 버려져 밟히고 있다. 이제 소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믿음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다. 빛이 보는 것을 사라지게 한다. 살인도 욕망의 끝이 아니다. 소금을 먹은 갈증일 뿐이다. 오직 십자가, 갈증은 끝나고, 모든 시작과 끝은 새로 기록된다. 에덴의 마침표다.
나무는 내 몸이 되고 파인 글이 나의 심장이다. 고백은 나의 영혼이며 소리는 거친 혈관이다. 유배된 삶을 이곳에 묻고 파도가 날아온 한 줌 모래의 하나가 되었다. 바람은 얼굴을 지우고 시간은 인내하지 않았다.
앙상한 가지가 되어 가을의 단풍을 기억할 때 생명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그것이 주검으로 남겨진 타버린 재위에 가냘픈 금이 하나 그려졌다. 그렇게 소리가 나무에 박혀 굳어져 버렸다. 이것은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무에 솟았던 불이다. 타지 않고 살아 있는 불. 불꽃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숨결. 우리는 신을 벗어야 한다.
이준영 / 목사
시인, 신학박사
시집 “바람난 理性”
신의 숨소리 등과 그리스도인의 자서전쓰기의 저서
한국신문방송총연합회 이사장
격월간“I am자서전”발행인
한국원로목회자협회 사무총장.
생명과평안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