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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 - 예방의학의 개척자 주인호 박사
평생을 전염병 역학 연구와 아프리카 전염병 예방에 전념, 한국에서는 보건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
기사입력: 2025/01/18 [11:51] ⓒ 국제언론인클럽(GJCNEWS)
제니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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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 예방의학의 개척자 주인호 박사

▲ 아프리카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 주인호 박사  © 제니윤 기자




 

 

 

 

 

 

 

 

 

 

 

 

아프리카지역 전염병 수석자문관 시절 주인호 교수

 

1976년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에서 괴질이 집단 발생해 의료인 20여명을 포함해 32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시신이 널려있는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혈청을 채취해 괴질이 에볼라 바이러스 떄문임을 밝혀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아프리카 대륙을 돌보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주인호 박사였다.

그는 이듬해인 1977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간다 정부의 반군기지를 찾아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천연두 환자 10여명에게 우두를 접종해서 영국 왕실은 주인호 박사의 이러한 인간 사랑을 높이 평가해 의학계의 노벨상으로 볼리는 종신학술위원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WHO 제네바 본부에서 ” 이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전히 박멸되었다”고 공식으로 선언하기도 하였고, 아프리카 지역의 전염병 예방과 퇴치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주인호 박사가 WHO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9년 인도에서 열린 콜레라 심포지움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6개국어에 능통하여 종횡무진 활동하는 주인호박사를 눈여겨 보던 WHO 관계자들이 주인호 박사를 스카우트 한 것이다. 그는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아프리카 지역 전염병 수석 자문관으로 일하며 평생을 전염병 역학 연구와 아프리카 전염병 예방에 전념하였다.

 

주인호 박사는 1942년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을 졸업한 뒤 전염병 역학연구에 전념하여 세계 최초로 일본 뇌염 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하는 학문적 업적도 남긴 분이다. 한국에서는 “ 보건” 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고, 해방직후 서울대 권이혁 교수, 연세대 양재모 교수와 함께 대한 예방의학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대학 2년 후배인 권이혁 전 학술원 회장은 “ 독재자로 알려진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도 그에게 한국산 인삼을 선물 했을 정도였다”고 회고할 정도로 아프리카의 국민들과 통치자들 조차도 “주인호 박사의 헌신과 그의 인품에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함께 살아가기, 소박한 생활 Living together, simple life “ 은 평생을 소박하게 살며 남을 위해 헌신해온 주인호 박사의 삶의 좌우명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환경문제를 염려하여 닥쳐올 심각한 쓰레기 문제에 대해 자식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하였다. 국가경제부흥을 이루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의식에 물들어 있을 때에도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소비를 줄이는 길 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절약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온 분이다.

매일 아침 동네 어귀를 청소해온 그는 집앞에 쓰레기를 줍고 동네 청소하는 일을 일과중의 하나로 생각하여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 왕십리 행당1동 청소부”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 모르는 사람들은 왜 청소부가 청소복을 입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 라고 하였다 . 3남 4녀를 모두 해외유학을 보내 일부에서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는 한국전쟁 이후 소천하는날까지 왕십리 18평 자택에서 살아올 만큼 무소유의 철학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 노인 건강을 위해 경로당을 최초로 성동구에 만들고 무학교회의 경로대학을 만들어 경로대학장을 20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 것이니 노인건강학을 연구하는 것이 의사들의 소명이다. 또한 의사는 봉사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자 책임이다” 라고 의사의 소명을 강조하였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비넥타이와 함께 기억하고 있다. 주인호 박사는 정장을 할때면 늘 나비넥타이를 매었는데 그 이유는 긴 넥타이에 비해 간편하고 활동이 편리하다는 순전히 멋과는 상관이 없는 실용적인 측면의 착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목에 걸린 나비넥타이 하나로 그분이 어떤 양복을 입었는지에는 전혀 눈길도 보내지 않은 채 그저 멋쟁이 의학교수로 기억해 주고 있으니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그에게는후줄근한 구식 양복에도 나비넥타이 하나로 아주 멋쟁이 신사로 변신하는 연출력이 있었던 것이다.

▲ 나비넥타이 멋쟁이 의학교수로 기억되는 주인호 박사     ©제니윤 기자

 

 

제니윤 기자
yoonjenny324@gmail.com
강원도 양구군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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